우리에게 좋은 기억력은 흔히 '똑똑함'과 직결된다고 여겨집니다. 중요한 정보를 오래 기억하고 필요한 순간에 꺼내 쓸 수 있다는 건 분명 유용한 능력입니다. 하지만 뇌과학자들은 이제 ‘망각력’도 그에 못지않게, 때로는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기억이 모두 저장되고 끝없이 축적된다면 우리는 오히려 삶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뇌는 생존과 감정 조절, 학습 효율을 위해 일부러 정보를 지우는 작용, 즉 ‘의도적 망각’을 수행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뇌가 왜 일부 기억을 지우는지, 망각이 왜 뇌 건강에 중요한지, 그리고 실생활에서 망각력이 중요한 사례들을 알아보겠습니다.
망각의 뇌과학적 메커니즘
기억은 단순히 입력되고 저장되는 수동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기억은 ‘형성’, ‘고정’, ‘인출’의 세 단계를 거치며, 그 과정에서 뇌는 필터링 기능을 수행합니다. 모든 정보를 다 기억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뇌는 ‘불필요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제거하는 시스템을 탑재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은 뇌의 시냅스 가지치기(synaptic pruning)와 관련이 있습니다. 학습이나 경험을 통해 형성된 수많은 시냅스 중, 반복되지 않거나 중요도가 낮은 연결은 자동으로 약화되거나 제거되어 기억에서도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해마(hippocampus)와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의 상호작용도 망각을 조절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해마는 새로운 기억을 일시 저장하고, 전전두엽은 그 기억의 '의미'와 '가치'를 판단해 어떤 것을 남기고 어떤 것을 없앨지 결정합니다. 특히 스트레스 상황이나 감정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기억은 뇌에 강하게 각인되지만, 일부 경우에는 방어적 망각(defensive forgetting)을 통해 불쾌하거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억제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뇌의 선택적 망각 기능은 우리가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망각력이 강한 뇌가 감정적으로 더 건강한 이유
망각은 감정 조절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의 실수나 상처를 끊임없이 떠올리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쉽게 무너지고 우울감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반면 건강한 망각 능력을 가진 사람은 불필요한 감정적 찌꺼기를 정리하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를 갖습니다. 실제로 연구에 따르면, 특정 트라우마성 기억을 잘 지우지 못하는 사람은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에 취약하며, 반대로 어느 정도의 망각력이 있는 사람은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수면과 망각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수면 중 뇌는 시냅스를 정리하고 낮 동안의 정보를 정제하는 ‘청소’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된 정보는 정리되고, 핵심 정보만 장기 기억으로 이전됩니다. 수면이 부족하거나 질이 나쁜 사람은 이 정리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감정 조절과 기억 능력이 모두 저하됩니다. 즉, 잘 자는 뇌는 잘 잊는 뇌이기도 한 셈입니다.
망각이 뇌의 자원 소비를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모든 정보를 다 기억하려면 막대한 에너지와 공간이 필요합니다. 망각을 통해 뇌는 자원을 더 중요한 인지 활동이나 생존에 필요한 판단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인간이 진화적으로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적응해 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기억보다 망각이 중요한 순간들 – 실생활 속 사례와 뇌 건강 팁
우리는 일상에서 ‘잘 기억하는 사람’을 칭찬하곤 하지만, ‘잘 잊는 사람’이야말로 감정적으로 건강하고 유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의 작은 실수, 인간관계에서의 다툼, SNS에서의 부정적인 댓글 등은 오래도록 기억할수록 스트레스를 유발합니다. 반대로 이런 기억을 적당히 잊을 수 있는 사람은 감정적 회복력이 빠르고, 다음 행동에도 영향을 덜 받습니다. 이처럼 망각은 실수를 '내일의 성장'으로 전환하게 해주는 심리적 완충 장치입니다.
망각력은 창의성에도 영향을 줍니다. 과거의 고정된 기억에만 머무는 사람보다, 불필요한 정보를 잊고 새로운 연결을 시도하는 사람이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리콘밸리의 창업가들, 예술가들 중 많은 이들이 과거 실패를 빠르게 잊고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는 ‘망각의 기술’을 자연스럽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망각력을 키우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가장 기본은 충분한 수면과 스트레스 조절입니다. 명상, 운동, 햇빛 노출은 뇌의 정서 조절 기능을 향상시키고, 불필요한 기억에 머무르는 것을 줄여줍니다. 또 하나 중요한 건, 기억을 ‘억지로 지우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억제는 오히려 기억을 강화시키므로, 자연스러운 주의 분산과 새로운 활동에 집중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결론: 뇌는 기억만이 아닌 망각으로도 진화한다
기억은 삶의 궤적을 기록하는 귀중한 도구이지만, 망각은 삶의 무게를 덜어주는 안전장치입니다. 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게 정보를 필터링하고, 저장하고, 제거합니다. 그리고 그 필터링 중 ‘지운다’는 선택은 때로 기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결정일 수 있습니다. 잘 잊는다는 것,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건강한 뇌를 원한다면, 기억력 훈련만큼이나 망각력도 훈련할 가치가 있는 영역입니다. 잊는다는 건 실수나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일 수 있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데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뇌의 섬세한 배려인지도 모릅니다.